(역사산책) 진정한 보시(布施)란
김대상 ‧ 양 무제의 사례는 보시의 의미 일깨워 오늘날 얼굴없는 천사기부 ‧ ‘무주상보시’여야 보시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소위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다. 이는 불교의 이타정신으로 진정한 보시는 무주상(無住相)보시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이나 휴정대사의 선가귀감에 따르면 삼륜상이란 보시하는 이, 보시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을 말하며 삼륜상을 마음에 두고 행해지는 보시를 유상(有相)보시라 하는데 이는 참다운 보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보시는 무주상보시로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베풀었다는 자만심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온전하게 베푸는 것이다. 이같은 진정한 보시와 관련 삼국유사 효선(孝善)편에 나오는 진정스님과 김대성의 보시는 무주상보시와 유상보시의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진정스님의 경우 무주상보시의 사례로 모친이 무엇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리가 부러진 솥을 시주한데 반해 김대상은 만 배의 공덕을 바라고 밭을 시주해 유상보시의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단지 일연은 효와 출가에 따른 불교와의 마찰 혹은 갈등을 효선쌍미(孝善雙美)라 하여 효와 선을 동일선상에 놓고 장려해야 할 덕목임을 제시하고 있지만 진정한 보시에 대해서는 간과한 점이 옥의 티라 할 것이다. 오늘날 일상에서 행해지는 보시는 반대급부를 내재한 유상보시의 형태가 다반사다. 제시와 법시 역시 공덕을 바라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소위 시줏돈의 명목으로 보시하는 행위가 대부분 소원을 비는 유상보시의 형태가 다반사다. 제시와 법시 역시 공덕을 바라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소위 시줏돈의 명목으로 보시하는 행위가 대부분 소원을 비는 유상보시의 형태임을 감안하면 공덕을 바라는 자체가 진정한 보시와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문제는 종교마다 유상보시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십일조헌금의 의미가 그러하고 불교 역시 보시를 통한 공덕을 은연중 강요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조건 없는 보시를 강조하려면 조건없는 공덕으로 다가와야 한다. 면죄부로 인한 종교의 타락이 개혁을 가져왔듯이 물질의 과다에 따라 공덕 가피가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종교는 당연히 보시, 헌금의 과다가 아닌 순수성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종교를 불문하고 운영 유지의 측면에는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정성 자비 혹은 자발적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는 미명하에 헌금을 유도하고 그 과다에 방점을 찍고 있다. 헌금을 하지 않으면 마음을 무겁게 함으로써 또는 반복된 교육과 율법에 의해 스스로 무거운 마음이 들도록 함으로써 공덕도 무위에 그칠 것이라는 불편을 심어줌으로써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보시, 헌금 없이 종교가 번성할 수 있을까. 큰 사찰과 조그만 암자, 큰 교회와 규모가 작은 교회의 차이는 시도수와 신도의 보시와 헌금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결코 단순한 논리로 재단할 문제는 아니라 하더라고 보시의 본질을 간과해서는 풀리지 않는 사안이다. 또 일상에서 이뤄지는 베품을 우리는 미덕 혹은 착함(善)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 베푸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좋은 일을 했다고 하면서 존경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한마디씩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결코 복을 받자고 한 행동이나 베품이 아니고 조건을 내포한 유상보시도 아니다. 복을 받을지도 못 받을지도 알 수 없다. 복을 수여할 주체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베품을 장려하고 쌓아 가는 것이 착한 일임을 안다. 불교에서는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것에 이어 이러한 생활 속에서 선업을 베푸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결론은 재시던 법시든 무외시든 자비로운 마음에서 조건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라야 한다는 것이다. 양나나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불교에 대한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며 나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달마는 공덕이 없다라고 한 것도 유상보시가 아닌 무주상보시를 주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반야심경의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에서 말하는 무소득의 자세가 무주상보시와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간간히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익명의 기부자와 얼굴을 알리지 않는 천사기부 행위가 무주상보시의 실천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찰마다 불상앞에 불전함 보시함 시주함 등을 비치해 놓고 보시를 유도하고 있다. 정확한 용어는 복전함이라고 해야 한다. 복전은 복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나 승려 등 공양을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이에게 공양하면 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 다음에 수확하여 거두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